우리마을유래

제목화양읍 신봉리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신봉리

상세내용

남산의 장엄한 두 줄기의 용이 하나의 주산인 비봉봉(飛鳳峰)이 되어 마을 앞을 달리고 하나는 갈마(渴馬)능이 되어 마을 뒤를 감고 돌아 나갔다. 이 두 고개사이의 계곡변 또는 중복에 자리잡은 마을로 본 읍내에서는 가장 고지대이기도 하다. 급한 경사지를 이용한 거주지는 계단식으로 되어 있어 아랫집 지붕이 뒷집 마당 같은 높이의 전형적인 산촌취락이나 그렇다고 심산유곡은 아니다. 청도팔경의 하나인 남산조양의 아침안개 속에 감싸인 마을이기도 하다.  중천에 옹립한 남산의 위용도 좋으나 춘삼월 호시절의 만산도화(滿山桃花)는 이 마을만 지닌 자연화다. 층층이 만개된 도원의 풍경은 속세에서는 아까우리 만큼 아름답다.

홍도(紅桃)마을
1700년대에 각남면 향인촌에서 아산인 장용호 공이 이거 구 죽림(竹林)사지 산비탈 터를 잡고 정착하였다 한다. 이는 현재의 홍도마을보다 훨씬 위쪽인데 아마도 당시의 홍도 마을에서는 주민이 살았을 것으로 보이나 분명히 알 수가 없다. 그후에 전주 이씨, 청도 김씨가 입촌 했다는 것이다. 신라시대부터인지 고려시대부터인지는 모르나 옛날부터 복숭아나무가 많아 홍도(紅桃)촌이라는 동명이 붙어진 것이라고도 한다. 옛날부터 이 마을을 삼천(三遷)촌이라고도 불렀다 한다. 이유는 이 마을은 도(桃)림, 송(松)림, 죽(竹)림이 일정한 연륜을 두고 반복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복숭아가 성하면 마을이 넉넉해지고, 죽림이 무성하면 마을에 불교가 흥성하고, 송림이 우거지면 마을의 경제가 파탄된다는 것이다. 이 자연의 섭리가 어떻게 되어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지 알 수 없으나 이산에 자리하고 있는 죽림사라는 고찰도 신라통일시대 창건 당시는 화남사(華南寺)라 했으나 너무 죽림이 성하여 죽림사로 절 이름을 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는 군내 2개소의 대나무숲 중의 하나로 이 곳의 청죽이 공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홍도화발(紅桃花發) 천가부(川家富)라는 말이 있다. 이 얼마나 상응한 말인가? 전국에서 명성 높은 청도복숭아의 근원지가 바로 이곳이다.

신기(新基)마을
홍도촌과 등성이를 사이에 둔 마을이다. 글자 그대로 새 터 마을이다. 아산인 장경수 공이 홍도에서 1800년대에 이곳으로 이거했다.
풍수지리설로 금안포란(金 抱卵)의 길지(吉地)라서 이곳으로 옮겨와서 마을의 터를 잡았다는 것이다. 신기천호(新基千戶) 만세영(萬歲營)이라는 풍수설이 현실로 나타남인지 자손이 흥성한 것은 우연이 아닌 현실이다.

륵원(勒院)
마을의 뒷산봉우리가 풍수지리설로 마분등지상(馬奔騰之狀)이라 동헌이 있는 소재지의 지기가 유실되기 때문에 이를 막아보자는 뜻에서 조선시대부터 원을 설치하여 륵원이라고 명명하고 고마청(雇馬廳)에다 별도로 말 수필을 격마사육(擊馬飼育)했었다. 이는 달아나려는 말의 형국을 인위적으로나 붙잡아 보자는 뜻이다. 그리고 륵원 부근에 빙고(氷庫-얼음창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북문 바깥과 혼동한 것인지 별도의 것인지는 확인할 수가 없다.

임수(林藪)
우리 군내에는 2개가 있었는데 그 중의 1개가 이 마을이다. 현재는 도내의 도원(桃園)이나 이 일대는 대밭으로 여기서 나는 청죽은 질이 좋아 공물로 헌상되었다 한다. 동향인 구릉일대가 대밭으로 절 이름까지도 바꾸게 했고, 관이 경영하는 대밭이라 관리를 잘하여 남산죽전(南山竹田)이라 하여 명성이 높아 도내의 많은 대밭중에서도 삼천(三遷)이라는 자연현상이 반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