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운문사
상세내용
◆ 대한불교조계종 운문사(大韓佛敎曹溪宗 雲門寺) ◆
전통사찰 : 가-74호
지정일자 : 1988년 7월 21일
소 재 지 : 경북 청도군 운문면 운문사길 264
창립년대 : 557년
운문사는 운문면 신원리 호거산(虎踞山)에 있는 사찰로 대한 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운문사사적」에 의하면, 557년(진흥왕 18년)에 한 신승(神僧)이 북대암 옆 금수동에 작은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수도하여 도를 깨닫고 도우(道友) 10여 인의 도움을 받아 7년 동안 동쪽에 가슬갑사, 서쪽에 대비갑사, 남쪽에 천문갑사, 북쪽에 소보갑사를 짓고 중앙에 대작갑사를 창건하였으나 현재 남아 있는 곳은 운문사와 대비사 뿐이다.
그후 600년(신라 진평왕22년) 원광 국사가 중창하였다. 그는 대작갑사와 가슬갑사에 머물면서 점찰법회를 열고, 화랑도인 추항( 項)과 귀산(貴山)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내려줌으로써 화랑정신의 발원지가 되었다. 오갑사가 창건된 시기는 신라가 불교를 중흥하고 삼국통일을 위해 국력을 집중하여 군비를 정비할 때였다. 이때 오갑사가 운문산 일대에 창건되고 화랑수련장이 만들어진다. 그것은 곧 신라가 서남일대 낙동강 유역으로 국력을 신장해 가는 과정으로써 운문사 일대가 병참기지로서 당시 신라로서는 전략상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보양이목조에는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태조왕건은 운문사에 있던 보양국사의 계책으로 이 일대를 평정하였다. 그 뒤 후삼국의 사회적 혼란을 어느 정도 수습한 왕건은 937년(태조 20년), 대작갑사에 '운문선사'라는 사액과 함께 전지 500결을 하사하였다." 고 한다. 이 때부터 대작갑사는 운문사로 개칭되었고, 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구축한 대찰로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1105년(고려 숙종10년) 원응국사(圓應國師) 학일이 제3차 중창한 후 왕사로 책봉되었다. 원응국사는 1129(인조7년) 년부터 이 절에 머무르실 때 운문사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1277년 일연선사는 고려 충열왕에 의해 운문사의 주지로 추대되어 1281년까지 머무르셨다. 이 곳에서 일연은『삼국유사(三國遺事)』의 집필을 착수하였다. 운문사의 절 동쪽에는 일연선사의 행적비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인 18세기 중반, 운문사는 설송 연초대사가 제4차 중창할 때와 19세기 전반 헌종 년간에서 운문사의 사세는 최고에 이른다.
그 후 제5중창주인 운악화상은 1839년에 오백전을 중수하였고 이듬해 응진전과 명부전·내원암·북대암등을 중건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청신암을 창건하였고, 1842년 금당을 중건하였다. 1958년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된 이래 수많은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1987년 승가대학으로 명칭이 바뀌고 전문교과 과정과 교수진을 확보하여 승가대학의 명분에 걸맞는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약260여 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이곳에서 경학을 수학하고 있으며 운문승가대학은 국내 승가대학 가운데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고 천연기념물 제180호인 처진소나무 외 30여동의 건물 과 7점의 보물, 11명의 고승대덕의 영정 및 많은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